(세기의 비하인드) 미국 대공황을 잠재운 천재 아역 배우 셜리 탬플

2023. 5. 28. 18:49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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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 공황 시기, 대중에게 힐링의 아이콘으로 통했던 아역 배우 셜리 탬플은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음해성 루머에도 시달렸다.

1920년대 후반 대공황으로 인한 취업난과 생계난으로 가혹한 시기를 보내던 미국인들 사이에서 힐링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할리우드 스타가 있었습니다. 금발 곱슬머리, 보조개가 있는 볼, 순수한 눈망울로 노래하고 탭댄스를 추는 아역 배우 셜리 탬플입니다. 세 살 때부터 할리우드에 진출해 세간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지요. 워낙 인기가 많았던 만큼 소녀를 향한 엉뚱한 소문도 많았습니다. 셜리는 어린이가 아닌 10살 딸을 둔 왜소증 환자라는 충격적인 루머까지 나돌았습니다.

아역 배우 셜리 탬플.

셜리 제인 탬플은 1928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은행 지배인과 전직 발레리나 부부의 셋째 아이,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발레리나 출신 엄마는 아이를 스타로 만들기로 마음 먹고 세 살 때부터 댄스 스튜디오에서 춤을 가르쳤죠. 한 프로듀서가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이 시작됩니다. 셜리는 2년 동안 26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주당 50달러에 계약했습니다. 그 시대에도 아주 박봉이었죠. 지금과 달리 과거 할리우드는 아역 배우에 대한 처우가 거의 아동 학대를 방불케 했습니다. 1988년 발표한 셜리의 자서전 <차일드 스타(Child Star)>에서 그는 “아역 배우가 연기를 잘못하면 블랙박스라는 차가운 얼음이 가득 찬 곳에 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셜리는 1930년대 고된 촬영 현장에서 4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다행히 특유의 밝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서전에서 그는 “블랙박스는 내 정신 건강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 깨달은 깊은 인생의 교훈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이 훈계하며 외쳤던 ‘시간은 돈이다. 시간 낭비는 곧 돈 낭비’라는 말은 뼛속에 남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셜리는 1933년 영화사 폭스의 작품 <스탠드 업 앤 치어>에 출연하게 됐고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뒤이어 <베이비 테이크 어 바우>와 <리틀 미스 마커>까지 흥행에 성공하며 할리우드 대표 아역 배우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역 배우 셜리 탬플.

우리나라에 셜리 탬플이 있는 한 우리는 괜찮을 것

- 루즈벨트 대통령

 

셜리의 주급은 1천 달러로 인상되고 영화가 끝날 때마다 1만5천 달러를 추가로 받았습니다. 대공황 시기였음을 고려한다면 할리우드 톱스타를 넘어서는 출연료였습니다. 셜리는 아역 배우였지만 당당한 티켓 파워를 가진 주연급 배우가 되었고 셜리만을 위한 셜리의 영화가 제작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브라이트 아이즈>였고 영화 속에서 부른 노래 ‘롤리팝(Lollippop)’이 크게 히트하며 셜리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줍니다.

한 영국 잡지는 셜리와 셜리 팬들을 두고 선 넘는 악평을 실었다가 미국과 영국 국가 간 갈등으로 커지면서 해당 잡지가 폐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소녀를 마냥 사랑스럽게 본 것은 아닙니다. 어른의 인기를 압도하는 아역배우인 만큼 시기와 질투도 상당했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영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한 잡지 평론으로 셜리의 연기와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두고 선 넘는 악평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평론을 실은 잡지 <밤과 낮>은 폐간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은 셜리의 1937년작 <위 윌리 윙키>를 두고 “소녀를 숭배하는 중년 남성들은 그녀의 의심스러운 교태에 반응하고 생명력이 가득 찬 소녀의 작은 몸을 보고 그들의 지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며 셜리의 팬들을 소아성애자로 취급해버립니다.

게다가 셜리를 두고 “‘유아기스런’ 모습은 위장이고 그의 연기는 더 비밀스럽고 더 어른스럽다”며 왜소증을 앓고 있는 어른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던집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미국에서 공분을 일으켰고, 다수의 미국인이 그의 악평을 셜리 탬플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주재 미국 대사 조지프 케네디는 그린과 <밤과 낮> 출판사에 항의 편지를 썼습니다. 셜리의 소속사와 가족은 명예훼손 소송까지 걸었습니다. 그린은 가족에게 사과하고 3천5백 파운드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고 잡지는 폐간되고 말았죠.

성년이 된 셜리 탬플의 모습.

신드롬과 같았던 셜리 탬플의 인기는 1940년대 들어서면서, 즉 그녀가 10대가 되면서 신기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그라듭니다. 이후 그녀는 과거의 위세에 기대어 몇 편의 영화를 더 찍었지만 결국 20대 초반 영화계에서 은퇴합니다.

그렇다고 셜리 탬플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셜리 탬플은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제2의 인생을 삽니다. 1969년 41세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총회 대표로 임명되었고, 이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가나 주재 미국 대사로 근무했습니다. 1989년부터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녀는 외교 업무 외에 자선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 협회의 후원자였고 질병 연구와 치료를 위한 기금 모금도 도왔습니다. 셜리는 1998년 케네디 센터 명예상과 2006년 미국 배우 조합 평생 공로상을 포함해 일생 동안 수많은 상과 명예를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받는 아역 스타로, 성인이 되어서는 외교관이자 자선 사업가로 항상 빛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줬던 셜리 탬플은 지난 2014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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