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1. 21:42ㆍ문화
▲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파우릭 설리반'(콜린 파렐)은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에서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 반려 당나귀 '제니'와 함께 사는 순진하고 상냥한 남자다. '파우릭'의 일상은 하나뿐인 친구 '콜름 도허티'(브렌단 글리슨)와 매일 오후 2시에 만나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수다로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파우릭'이 '콜름'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절교 선언을 듣게 되고, 걱정도 없어 보였던 그의 일상은 뒤바뀌어 버린다. 진지하고 단호한 성격의 '파우릭'은 앞으로의 남은 삶을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 활동, 사색에 전념하면서, 인생의 유작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한때 '파우릭'의 밝은 성격이 '콜름'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파우릭'과의 수다가 그저 시간 낭비로만 느껴졌고, 예술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기로 한 그의 극단적인 결정은 '파우릭'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다. 집에 찾아가도 나와보지 않고, 말을 걸어도 무시하면서 자신을 끊어내려는 '콜름'의 일방적인 결정을 '파우릭'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어도, 포기하지 않은 '파우릭'은 항상 '콜름'을 찾아가 채근하지만, 상황은 악화된다. 결국, '파우릭' 역시 슬픔, 외로움, 분노의 감정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한편,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은 '콜름'의 절교 선언에 덩달아 동요했고, 이내 독서와 저녁 식사 준비로만 외로움을 채우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메가폰을 잡은 마틴 맥도나 감독은, 200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연발 권총>이라는 작품으로 단편영화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연출 필모그래피를 시작했다. 그의 장편 영화들은 대부분 본인이 직접 써 내려간 시나리오를 통해 완성됐는데, 장편 데뷔작인 <킬러들의 도시>(2008년)는 블랙코미디와 누아르 장르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를 통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전작인 <쓰리 빌보드>(2018년) 역시 사회적 정의를 위해 움직이기보다는 자신의 딸 살해범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주인공의 여정에 동참하는 이야기를 통해, "소수자가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는 편견"에서 다른 접근을 시도해냈다.
<이니셰린의 밴시>를 통해서 마틴 맥도나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통산 3번째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안타깝게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7관왕 열풍에 밀린 감이 없지 않지만, 마틴 맥도나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전작들이 지녔던 뜨거운 강렬함보다는, 관계의 변화로 인한 냉혹한 파장이 존재하는 이야기가 느껴졌다. 그런데도 감독 특유의 서늘한 이야기와 해학이 있는 대사, 그리고 단순히 희극과 비극을 장르로 결합해내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퀀스나, 하나의 대사에서 희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센스는 여전했다. 오죽 웃음이 없는 언론 시사회에서조차, 객석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틴 맥도나는 풍경의 장엄함, 일몰의 아름다움, 폭풍우를 보여주는, 아일랜드다운 아일랜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 지미 키멜의 농담도 있었지만(아일랜드 출신 배우들이 많이 후보에 올랐다면서, '글로벌'한 시상식이 됐다고 말했다), 이는 올해 아카데미의 특색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수상작인 <언 아이리쉬 굿바이>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이가 소원해진 형제가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아일랜드의 자연과 함께 녹여냈다.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로 '아일랜드 대표'가 된 <말없는 소녀> 역시 아일랜드의 '게일어'를 사용한 몇 안 되는 영화로, 가족의 의미는 어떻게 정의되는가를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배경은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두고, 영국의 분할 통치에 찬성하는 이들과 아일랜드 자유국 건국에 찬성하는 이들 사이의 전쟁)이 일어난 시기, 두 친구의 절교와 어우러지면서 우화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내전에 관한 영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년)을 추천한다) '파우릭'은 내전이 어서 지나가기를, 그래서 아일랜드의 분할에 찬성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고, '콜름'은 자신의 성격처럼 아일랜드 자유국 건국에 찬성하는 입장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의 지난한 대립이 파국으로 향한 것처럼, 당시 아일랜드도 서로를 향한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다.
물론, 두 사람의 대립은 '아일랜드'로 비유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사유를 제공한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파우릭'은 '콜름'이 왜 더 이상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라면서, "우리가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버려졌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라고 밝혔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나를 좋아하기는 한 거야', '아니면 나 혼자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착각한 거야?'라는 생각이 들 터. 감독은 "관객들이 둘 중 어느 쪽과 자신을 동일시하는지 보는 것이 흥미롭다"라면서, "먼저 절교를 선언한 '콜름'의 단호함이 이해될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받은 다정한 '파우릭'에게 더 공감될까?"라고 전했다.
작품 속, '파우릭'과 '콜름'의 관계는 겹겹이 존재하는 폭력의 문제, 부재의 연속인 대화와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이 놓여있다. 절교 선언으로 인해 충격과 상처를 받는 '파우릭'과 그에게 뚜렷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콜름'의 관계성과 태도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인간관계를 경험해 본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전한다. 특히 친구 맺기와 팔로우, 손절과 차단 등 맺고 끊기가 쉬워진 관계의 시대에 관객들에게, 관계에 대한 답이 아닌 물음을 던지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야기는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분명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인 지금도 응당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by. 알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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