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우리 문화재를 찾아서

2022. 9. 8. 18:02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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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계 도처에는 빼앗긴 채 돌려받지 못한 우리 문화재가 그득하다.

 

최근 영국 경매장을 떠돌던 조선시대 유물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간신히 고국 땅을 밟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붉은 가죽 표면에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상자 형태의 유물은 다름 아닌 ‘보록(寶 )’. 임금의 의례용 인장인 어보를 보관하는 함으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상징하는 주요한 문화유산이다. 보록의 귀환은 나라 밖의 우리 문화재를 관리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이제 막 소장자가 된 영국 법인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다. 재단은 지난해 경매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문화재청과 긴밀히 협의해 매입을 추진했는데, <리그오브레전드(LoL)>로 유명한 글로벌 게임사 라이엇 게임즈가 이를 후원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특별전을 찾으면 보록 못지않게 사연 많은 환수 문화재를 대거 만나볼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아 그간 환수한 780여 점 중 40여 점을 엄선해 내놓은 자리. 워낙 세계 곳곳에 산재했던 터라 귀환 거리도 수백, 수천 킬로미터쯤은 예사다. 한국전쟁 당시 도난당했던 고종의 국새는 미국에서 찾아왔고, 겸재 정선의 작품 21점이 수록된 화첩은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영구 대여 방식으로 환수했다. 조선 왕들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列聖御筆)’과 조선 후기 보병들의 ‘면피갑(綿皮甲)’, 덕혜옹주가 어릴 때 입은 당의, 스란치마도 각각 미국, 독일, 일본에서 돌아온 것들이다.
 
재단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는 대략 21만4200점. 총 25개국 중 일본 소재가 9만4300여 점으로 단연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이는 공개적인 출처로만 확인한 숫자인지라 개인 소장품 등을 포함하면 적어도 2배는 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 강임산 부장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불법·부당 반출 사례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운 건 입증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죠. 물론 모든 국외문화재가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것은 아닙니다. 적법한 구입이나 기증, 외교 선물 등을 통한 사례도 적지 않으니까요.” 재단 측이 밝힌 환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소장 기관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고미술시장에서의 유통조사 모니터링 등을 통해 문화재 반출 경위를 지역별, 시기별로 꼼꼼히 조사한다.
 
이 과정에서 도난 당했거나 불법·부당 반출된 문화재가 확인될 경우 본래 소장처, 경찰청 및 문화재청, 종단 등과 정보를 공유해 적합한 해결 방안을 찾는다. “때론 불법· 부당한 경위를 입증하더라도 현지 법령으로는 제재 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기증이나 매입 등 여러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소장자의 의지도 중요하고 기금 조달 문제도 해결해야 하죠. 이런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즉각적이고 단기적으로 환수가 완료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법적 환수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드는 만큼 전시 및 연구 지원이나 수리·복원 후원 등을 통해 현지에서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물론 억울하게 빼앗긴 유물이라면 치밀하게 조사해 돌려받는 게 최우선이지만, 적어도 타지에서 방치되고 훼손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 이를테면 20세기 초의 대형 금박 병풍인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의 경우 미국 소장가 가족에 의해 데이턴미술관에 기증됐는데, 재단이 이를 잘 보존 처리한 뒤 돌려보내 지난 6월부터 특별 전시되고 있다.
 
지금도 해외를 떠도는 우리 문화재 중에는 국가를 넘어 인류적 차원에서 손꼽히는 유산이 적지 않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직지(直指)’가 대표적인 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다. 인류의 인쇄 기술 진화를 보여주는 가장 유서 깊은 증거물인 셈이다. 현재 일본 덴리대 도서관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일본과 미국, 유럽에 흩어진 고려 불화들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문화재 환수를 둘러싼 여러 화두는 결국 대중의 관심을 수반해야만 지속 가능하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 최근 미술시장에 유례없는 호황기가 도래했지만 우리 문화재에 대해선 여전히 무심한 것이 사실이다. 당장 아트페어에 들끓는 인파나 갤러리의 오픈런 소식도 고미술시장과 큰 접점을 찾기 어렵다.
 
강임산 부장은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문화재에 무관심한 이유는 이를 이해하고 체험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라고 봅니다. 즉,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거죠. 공교육 과정에서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힘으로써 감수성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박물관 등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체험 기회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요.” 보록을 포함해 지금껏 6점의 유물 환수를 도운 라이엇게임즈 측은 “젊은 세대 이용률이 높은 게임 콘텐츠를 개발, 서비스하는 기업으로서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자 했다”며 후원의 배경을 밝힌 바 있다. 나라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문화재가 우리의 역사이자 정체성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세대를 잇는 지속적인 관심과 환기만이 우리가 우리 것을 지키고 정당하게 되찾을 수 있는 무기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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