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8. 19:57ㆍ인테리어
오디오 평론가 이현준이 전하는 브라운, 뱅앤울룹슨, JBL 등의 하이엔드 오디오 피스의 역사.
1966년 당시 유행한 공상과학 문화를 반영, 미래적 오디오 디자인을 제시한 클레어톤의 ‘프로젝트 G2’. 상위 모델인 ‘프로젝트 G’와 유사하지만 캐비닛과 스탠드의 일부 디자인이 달라졌다.
최초의 축음기인 포노그래프의 등장 이후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오디오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 치열한 기술 전쟁으로 터득한 고정밀 전자 · 전파 기술이 오디오에 스며들어 FM 라디오, 스테레오 음반, LP, 개인용 헤드폰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 문화적 호황에 소비자 또한 신제품을 구입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 같은 시기에 가구 신도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이라 불리는 혁신을 맞았다. 열성형 합판 기술을 가구에 도입한 임스 부부, 앤트 체어와 세븐 체어를 발표한 아르네 야콥센 등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서로 자극하며 놀라운 디자인 피스를 쏟아냈다. 가정으로 진출하려는 오디오 회사와 급성장한 가구 시장이 이 시기 마침내 조우했다. 대부분의 디자인 오디오는 뛰어난 산업 디자이너와 협업할 때 탄생했다. 즉 고도의 엔지니어링과 날카로운 심미안이 합치됐을 때 소위 ‘명기(名機)’가 만들어지는 것. 좋은 오디오는 귀뿐 아니라 눈을 만족시킨다. 음악이 흐르지 않을 때도 오브제로서 소임을 다해야 한다.
미드 센추리 모던 유행을 반영한 브라운의 ‘SK5’. ‘SK4’의 라디오 성능을 개선해 1958년 발매한 모델.
1951년 브라운(Braun) 창업자 막스 브라운이 세상을 떠나고 2세인 에르빈(Erwin) & 아르투어(Arthur) 브라운 형제는 당시 유행한 ‘미드 센추리 모던’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룰 오디오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마침 1953년에 개교한 울름(Ulm) 조형대학에서는 경제대공황과 나치당 집권으로 사멸한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고, 브라운 형제는 이들을 찾아 대대적 협업을 시작한다. 이때 탄생한 아트 피스가 바로 ‘SK4’(1956) 시리즈.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 정신을 좇아 당시 유행하던 장전축(가구처럼 생긴 긴 전축)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겼다. SK4는 턴테이블, 라디오, 스피커를 한 대의 기기에 담아낸 올 인 원 오디오다. 디자인은 울름 조형대학 교수이자 브라운 디자인의 총책임자였던 한스 구겔로트, 게르트 뮐러, 당시 24세의 디터 람스가 담당했다. 브라운 제품의 디자인을 디터 람스 혼자 도맡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브라운 디자인 팀의 공동 설계인 경우가 대다수다. SK4의 경우 한스 구겔로트가 인클로저(스피커 통)를, 디터 람스가 전체적인 프레임과 배열을 그리고 게르트 뮐러가 톤암을 디자인했다. SK4 디자인이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당시의 천편일률적인 장전축 형태를 벗어난 것은 물론 목재와 금속, 플라스틱이라는 이형 재료를 멋지게 조합해 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SK4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 콜렉터들에게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디자이너 임스 부부가 트루소닉과 함께 만든 오디오 중 대표작인 스피커 ‘E3’.
JBL사의 ‘파라곤(Paragon, 1957)’은 오디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로 꼽힌다. 1954년 ‘D30085 하츠필드(Hartsfield)’로 홈 오디오 진출에 성공한 JBL은 당시 소개된 스테레오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스피커를 구상했다. 하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리처드 H. 레인저의 뛰어난 설계를 수년간 제품화하지 못했다. 그때 산업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가 귀인처럼 등장했다. JBL은 그와 컨설팅 계약을 맺고 이내 상품화에 성공하는데, 이 제품이 바로 ‘파라곤’이다. 2m 60cm의 길고 장엄한 디자인 내부에는 좌우 대칭으로 트위터와 혼, 우퍼 유닛을 넓게 배치했다. 내부에서 생성된 음은 가운데 자리 잡은 배플(스피커를 장착하는 용도의 판재)을 향한다. 유닛의 음이 직접적으로 리스너에게 닿지 않고 배플에서 반사, 확산되는 독특한 방식은 스테레오의 협소한 스위트 스폿(간접적으로 사운드를 청취하는 환경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 한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음이 왜곡되지 않은 채 확산되려면 배플의 소재와 반사각이 중요한데, 아놀드 울프는 임스의 영향을 받아 울림이 뛰어난 목재 합판을 완만한 곡면으로 가공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파라곤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음질보다 디자인이다. 아놀드 울프는 스피커의 만듦새를 하이엔드 가구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고급 월넛과 마호가니 등 재료를 엄선해 수작업으로 총 112시간을 할애해 완성할 정도였다. 1830달러로 당시 판매 중인 스피커 중 발매가가 가장 높았음에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오디오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26년간 생산될 정도다.
B&O의 오디오 중 야콥 옌센이 디자인한 오디오 장비들.
임스 부부와 트루소닉(Trusonic)이 협업한 오디오도 주목해야 한다. 1950년대 벨에포크 시대의 미국, 경제 호황과 함께 TV와 홈 오디오가 본격 보급되자 사람들은 편히 앉아 음악과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라운지 체어를 필요로 했다. 임스 부부는 1947년 친구인 빌리 와일더 감독의 부탁으로 영화 감상용 의자 ‘임스 라운지 체어’를 제작했다. 아름다운 열성형 합판과 푹신한 가죽 쿠션,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편안한 오토만을 갖춰 지금도 최고의 음악 감상용 의자로 꼽히는 제품. 홈 오디오 시장이 무르익은 1956년, 임스 부부는 묵혀둔 임스 라운지 체어를 세상 밖으로 꺼내기로 결심했고, 당시 이례적으로 TV 방송을 통해 론칭해 종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임스 부부는 이 기세를 오디오 제품에도 이어갔다. 1940년대에 디자인한 라디오 제품의 인기로 오디오 시장 진출에 자신감이 넘쳤던 이들은 임스 라운지 체어에 앉아 자신들이 디자인한 오디오로 음악을 감상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꿈꿨다. 마침 친구인 버트 베를란트, 버나드 D. 컬린이 스피커 제조사 트루소닉을 인수했다. 1938년 LA에 설립된 트루소닉은 JBL과 오랜 경쟁 관계였다. JBL과 파라곤이 홈 오디오 시장에서 연이어 성공하자 트루소닉은 시장 공략을 위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임스 부부와 손잡았다. 이들은 1957년 총 네 가지 종류의 제품을 출시했다. 3웨이 스피커 ‘E3’, 2웨이 스피커 ‘E1’과 ‘E2’, 동축 스피커 ‘E4’까지 특유의 완성도 높은 디자인은 경쟁자를 압도했다. 디터 람스도 이듬해 선보인 스피커 ‘L2’에서 임스의 원형 블랙 그릴을 벤치마킹할 정도였으니까. 가장 임스다운 제품으로 꼽히는 ‘E2’와 ‘E5’는 스탠드에 라운지 체어의 베이스 디자인을 그대로 활용해 인기를 끌었고, ‘E4’는 콤팩트한 모델이지만 육면체의 스피커 통을 다시 합판으로 부드럽게 감싸는 놀라운 공법을 자랑했다. 임스의 스피커는 탁월한 미감에도 제조사의 경영난으로 인해 단기간 소량생산되고 사라져 더욱 전설처럼 남았다.
B&W의 모튼 워렌이 디자인한 ‘엠퍼시즈’
클레어톤(Clairtone)의 ‘프로젝트 G’(이하 G) 시리즈는 미래의 오디오 디자인을 제시했다. “파라곤? 이게 더 훌륭하지!”라며 내게 클레어톤 G를 소개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 떠오른다. 국내에 디터 람스, 조지 나카시마를 가장 먼저 소개한 그는 한 전시회를 통해 클레어톤 G의 존재를 국내에 최초로 알렸다. 클레어톤은 파라곤, 임스 스피커의 성공에 자극받은 엔지니어 피터 뭉크, 디자이너 데이비드 길모어가 1958년 캐나다에서 창업한 오디오 제조사다. 이들은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에 반기를 들어 더욱 세련된 장전축 형태의 디자인으로 회귀하고자 했다. 하이엔드 오디오와 스칸디나비아 가구 디자인의 결합을 추구한 것. 마침내 1964년 1월, 클레어톤은 시카고 가구박람회에서 휴 스펜서가 설계한 신제품 프로젝트 G를 발표했다. 기존의 장전축 디자인에 모더니즘을 결합한 이 제품은 로즈우드 소재 캐비닛에 엘락(Elac)의 턴테이블과 앰프를 수납하고, 미끈한 알루미늄으로 마감한 스탠드 아래에 바퀴를 달아 이동성까지 확보했다. 당시 유행하던 공상과학(Sci-Fi) 문화를 반영한 블랙의 구형 스피커를 좌우 끝에 배치해 적확한 스테레오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클레어톤 G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도 클레어톤 G를 ‘가장 아름다운 오디오’로 꼽았고, 〈플레이보이〉 발행인 휴 헤프너는 자신의 플레이보이 맨션에 설치했으며, 배우 숀 코너리,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도 G를 선택했다. G의 인기로 클레어톤은 1966년 대규모 공장을 증설하고 유사한 디자인의 하위 모델 G2, 엔트리 모델 G3를 발매했다. 짜릿한 성공에 취해 사세를 무분별하게 확장하던 클레어톤은 1971년에 파산했지만, 브랜드 디자인은 2000년대 이후 재조명돼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케네스 그렌지가 디자인한 B&W의 ‘DM6’
뱅앤올룹슨(Bang & Olufsen, 이하 B&O) 오디오들은 경이롭다. B&O은 1925년 엔지니어 페테르 뱅과 스벤 올룹슨이 덴마크에서 창업한 오디오 기업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침을 겪은 B&O은 TV 판매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오디오 신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브라운의 디터 람스, JBL의 아놀드 울프처럼 산업 디자이너를 기용하며 성공한 사례를 엿본 이들은 당시 주목받기 시작한 덴마크 디자이너 야콥 옌센과 손잡는다. 1967년 ‘베오마스터(Beomaster)’로 성공적 협업을 시작한 이들은 1972년 234종의 제품을 쏟아냈고, 이 중에서 27종을 ‘MoMA’에 영구 전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야콥 옌센의 대표작은 1972년 공개한 턴테이블 ‘베오그램(Beogram) 4000’. 시계처럼 촘촘한 선형을 새긴 플래터와 혁신적인 듀얼 암 구조를 채택해 B&O 디자인 언어를 세상에 천명한 작품으로, 사람들은 우주선을 보는 듯한 외관에 열광했다. 야콥 옌센이 은퇴한 후 자리를 이어받은 제자 데이비드 루이스는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베오사운드(Beosound) 9000’를 포함해 B&O 베스트셀러 대부분을 디자인했다. 지난 50년간 오디오 디자인을 얘기할 때 모두가 B&O을 떠올리는, 지금의 ‘B&O 신화’는 두 사람이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LP가 부활하며 B&O 팬들은 베오그램 4000의 재발매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B&O은 결국 2020년 재발매를 결정했다. 일반적 경우와 달리 이들은 베오그램 4000 빈티지 제품 95대를 직접 매입한 후 본사 공장에서 분해, 재가공, 조립을 거쳐 오리지널 빈티지를 완벽하게 복원해 판매했다. 과연 B&O다운 선택이었다.
영국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설치된 B&W의 ‘매트릭스 801’. 전 세계 스튜디오 스피커의 기준이 됐다.
테크닉과 디자인의 완벽한 조화는 바워스 앤 윌킨스(Bowers & Wilkins, 이하 B&W)의 오디오 피스에서 가장 선명하게 읽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육군왕립통신대에서 복무한 존 바워스와 로이 윌킨스는 1965년 고향에서 서로의 이름을 딴 ‘바워스 앤 윌킨스(B&W)’라는 오디오 판매점을 창업했다. 스피커 제작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존 바워스는 업무시간 외에는 스피커 제작에 몰두했고, 1966년 이를 눈여겨본 단골 고객 캐서린 나이트가 그에게 창업자금으로 1만 파운드의 유산을 남겼다. 유지를 받든 존 바워스는 스피커 제조사를 설립해 첫 제품 ‘P1’을 발표했다. 당시 영국에는 내로라하는 스피커 기업이 즐비했기에 신생 기업인 B&W가 설 자리는 없었다. 존 바워스는 절치부심해 1974년 두 가지 혁신을 거듭했다. 첫 번째는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한 고강력 신소재 섬유 케블라(Kevlar)로 스피커 유닛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 것. 옐로 컬러의 케블라 유닛은 B&W의 시그너처가 됐다.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나 또 하나의 레전드 피스로 꼽히는 브링크만의 벨트 드라이브 ‘밸런스’. 레코드 이상의 예술을 추구했다.
두 번째는 산업 디자이너 케네스 그렌지와 계약한 일이다. 블랙 캡 택시, 앵글포이즈 램프로 영국 최고의 디자이너로 꼽히는 그가 1976년 꺼내놓은 ‘DM6’는 B&W의 매출을 단번에 10배 이상 끌어올렸다. 1979년 발표한 ‘매트릭스(Matrix) 801’은 비틀스의 탄생으로 전설이 된 영국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메인 스피커로 쓰이며, 전 세계 스튜디오 스피커의 표준이 됐다. 디자인의 위력을 체감한 B&W는 케네스 그렌지와 작업함과 동시에 신인 디자이너 발굴 공모전을 통해 20대의 모튼 워렌을 발굴했다. 1989년 트럼펫을 오마주한 그의 스피커 디자인에 감탄한 이들은 곧장 상품화를 결정했고, 이 제품이 지금까지 컬렉터들을 사로잡는 ‘엠퍼시스(Emphasis)’다.
클라우디오 로타 로리아가 디자인한 골드문트사 최고의 역작, 미래적 디자인의 스피커 ‘아폴로그’, 브링크만 탄생 10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드라이브 턴테이블 ‘오아시스’.
이후 모튼 워렌은 B&W에 입사해 ‘노틸러스(Nautilus) 800’ 시리즈, ‘제플린(Zepplin)’ ‘M1’과 헤드폰 ‘P7’ 등을 디자인했다. 뜨거운 반응을 이끈 제품들은 B&W가 시장 1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기술력을 지닌 엔지니어가 탁월한 디자이너와 만났을 때 완성되는 시너지 효과는 B&W의 커다란 상징으로 남았다.
진동 감쇄와 미학적으로 뛰어난 역할을 하는 크리스털 글라스 소재 플래터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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