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보라의 현실 끝에서의 상상

2022. 9. 28. 01:5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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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보라를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기상천외한 상상도 상상이지만, 데모를 취미라 말하기도 하는 현실의 상상가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단편집 <여자들의 왕>을 펴낸 정보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부커상 시상식이 있고 4개월이 지났다. 작가 생활 20여 년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정말 너무 많은 일들이 폭풍같이 몰아쳐서 좀 광풍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작년 말에 남편의 간암이 재발했고, 올해 초에는 시어머니가 갑자기 무릎 수술을 받았다. 1월에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동시에 각각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걱정에 부커상은 별 생각하지 않았다. 출판사도, 에이전시도 모두 기뻐해줘 다 좋았지만 난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단편집 <여자들의 왕>이 나왔다. 남성 중심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의 주어를 여성으로 치환해본 작품이다.
처음 세 편인 ‘공주-기사-용’ 3부작을 쓰고 싶어 낸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단행본 분량이 나오지 않으니 다른 작품들을 더한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좀 관심을 받게 되면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웃음) 출판사 쪽에서 빨리 내자고 하시더라.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을 모아보자’ 생각해서 적극적이고 진취적 캐릭터의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골랐고, <저주토끼>와 다르게 밝은 느낌의 이야기를 고려했다.
 
이야기의 ‘주어 바꾸기’가 곧 이야기이자 형식이 된 셈이다. 막상 읽어보면 주어만 바뀐 게 아니라, 기존 서사를 지탱해오는 클리셰랄지 모티프 같은 것들이 재치 있게 도발되고 있더라.
'공주-기사-용’ 이야기는 대학원 때부터 생각했다. 러시아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원초연대기>에는 여성 군사 지도자로 유일하게 올가 공주가 나온다. 그녀는 지략을 이용해 남편을 죽인 동시에 적에게 복수를 하고, 나중엔 적들을 섬멸한다. 그런 올가 공주를 국가와 민족을 지킨 영웅으로 묘사한다. 매우 드문 경우지 않나. 하지만 이후엔 언급이 되지 않거나 정숙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 자애로운 이웃으로만 등장한다.유독 기억에 남았고, 이분법적 성 역할을 뛰어넘는 관점이 실제 역사상 존재했기 때문에 활용해보고 싶었다.
 
표제작은 ‘여자들의 왕’이지만, 첫 작품 ‘높은 탑에 공주와’를 읽었을 때 ‘무엇을 말하고 싶구나’가 전해진 느낌이었다. 과격한 묘사도 있었지만 끝내는 ‘괜찮다’고 어딘가 안착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작과 결론을 먼저 정하고 쓴다’고 인터뷰한 것도 봤는데.
문학 이론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는데 ‘러시아 형식주의’란 게 있더라. 소설을 길이별로 구분하고, 장편은 여행을 하는 것, 단편은 언덕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특히 단편은 언덕을 올랐을 때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져야 한다, 시작은 결말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저주토끼>가 나오고 난 뒤 봤다. 작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데, 러시아 형식주의에 따르면 최소한 잘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저주토끼>는 초기엔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 대중에 주목받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케이스란 느낌도 든다.
<저주토끼>가 읽어서 마음 편해지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한국의 독자들은 좀 지쳐 있는 것 같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 보면 위안이 되거나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희망에 찬 게 많다. 나 역시 <저주토끼>가 출간될 때 잘 안 팔릴 것 같았다(웃음). 기분 좋아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향이 맞으면 견디며 읽어줄텐데, 힘든 사람에게 굳이 그런 걸 요구할 순 없으니까. 다만, 외국 독자들에게는 본인의 현실이 아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이야기 자체로 읽어주신 것 같더라.
 
정보라의 소설은 SF, 스릴러, 호러이기도 하지만 그 장르 안에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느낌을 준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10여 년 러시아 폴란드 문학을 가르친 이력 때문이라고도 생각하는데, 독자에 대한 고민도 하는 편인가?
나 역시 내 작품이 ‘마이너’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초기 시절부터 꾸준히 읽어주는 분들이 있다. 물론 작품을 번역하고 수출하는 꿈을 가져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잘 안 팔리는데 팔릴 리가 있겠어?’(웃음) 그렇게 생각했다. 또 강사라는 본업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은 진지하게 썼지만 소설가로 유명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한국적인, 가장 현실의 한국을 이야기한다. ‘쓰레기 만두 파동’ 사건에서 <저주토끼>가 시작되거나,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서 <그녀를 만나다>가 태어나는 식이다. 너무나도 다른 두 세계가 어떻게 한작품 안에 공존할 수 있을까?
가장 첫 번째 원칙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두 이야기라 하면 일정 연령대 이상은 금방 알아챈다. 그럼 해당 가족이나 당시 피해를 겪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상처를 주게되고, 그럼 안 되는 거다. 일단 주제를 정했으면, 현실에서 가장 먼 쪽으로, 절대 현실의 특정 문제가 생각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정서적 반응은 같기 때문에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하면서 현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게 작가로서 능력의 검증이라고도 생각한다. 있는 사실을 받아 쓰기만 하면 논픽션 작가지 소설가는 아니잖나. 소설을 쓴다면서 논픽션을 쓰면 그건 소설가도 논픽션 작가도 아닌, 그냥 민폐인 거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도록 굉장히 많은 궁리를 한다.
 
변기에서 머리가 나타나고(‘머리’), 토끼가 3대를 멸하는 굉장히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쓴다. 동시에 매우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이기도 한데, 말하자면 현실에서 비현실이 추출되고 있는 셈이다.
살다 보면 계속 경험이란걸 하게 된다. 강한 인상을 받으면 좋든 나쁘든 계속 생각 하게 되고 그럼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당사자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송 걸리는 거 피하기 위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고, 정서적으로는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지만 장면 하나하나는 완전히 비현실로 가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쓰고 있다.
 
얼마 전에는 러시아의 판권 제안을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거절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굽히면 굽힐수록 이건 아니다 싶은 상황만 늘어나더라. 러시아에서 억만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굽혀야 하나 싶기도 하고. 러시아에 책 안 팔아도 먹고살 수는 있으니까(웃음).
 
2020년 결혼을 하고 남편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대게’ ‘문어’와 같이 수산물을 제목으로 한 작품 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포항 남자랑 결혼해서. 남편은 매일 해양 수산물을 먹는다. 서울에 살던 내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그런데 포항 오니 해산물의 차원이 다르더라. 어시장에 갔더니 해산물이 막 살아 있고. 너무 신기하면서 무섭고 또 신기하고. 여러 가지로 문화 충격이라 작품에까지 등장하게 됐다.
 
그럼 정보라의 ‘해양 수산물 O부작’과 같이 새로운 챕터가 시작하는 걸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정보라의 길티 플레저
미쓰다 신조라는 일본의 호러 작가를 좋아해서 <산 마처럼 비웃는 것>을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호러 장르를 준비 중인데 어떻게 재미있게 무섭게 쓸 수 있을까 궁리 중이에요.
여자들의 왕
공주를 구하러 온 기사를 물리치는 그녀의 칼날에서 시작하는 단편집.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파헤치는 전복과 도발의 상상력 그리고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이야기되지 않은 것을 과감히 펼쳐낸 장쾌한 여성들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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