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시장'이 일어난다

2022. 10. 21. 19:31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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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산업은 어느덧 스트리밍과, 영화 산업은 OTT와 불안한 동거를 시작한 시절. 불현듯 제3의 변수가 등장했다. 여느 때보다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듣는 시장’이 일어난다.


유튜브를 열고 고전소설의 낭독 파일을 듣는다. 구독 서비스를 정리하며 유료 서비스를 해지한 스포티파이는 팟캐스트 듣기용이 되어버렸다. 네이버 포털을 열고는 라디오를 듣고, 팟빵에선 김혜리 기자가 발행하는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을 구독한다. SNS 생활권의 행동 루틴이 변해버렸다. 대체로 별일 없는 내 트위터가 요즘 알림을 울려오는 건 심심찮게 대화를 제안해오는 ‘스페이스’의 알림창. 2021년 10월 트위터는 실시간 음성 대화 서비스 ‘스페이스’를 공개했다. 트위터라면 140자의 지저귐인데, 이젠 소리를 내며 지저귄다.
 
사명까지 메타로 바꾼 (구)페이스북은 AI에 집중하나 싶었지만, 같은 해 4월 그와 비슷한 실시간 대화 서비스 ‘오디오 룸’을 론칭한 상태다. 초대받은 이만 이용할 수 있는 폐쇄성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던 ‘클럽하우스’가 ‘대화의 SNS’ 를 선포한 이래, 지금 우리 일상을 실어나르는 건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닌 소리다.
 
OTT가 들썩이고, 스트리밍 시장이 일상 곳곳에 스며드는 가운데, 불현듯 제3의 변수가 등장한 느낌이랄까. 소리 데이터 연구가 아미르 허쉬는 지난 5월 <포브스> 인터뷰에서 “2021년, 올해는 귀의 해(The year of the Ear)”라 이야기했는데, 아무런 소리도 없이 지금, ‘듣기의 시장’이 일어난다.
 
소리의 커뮤니케이션, 오디오 콘텐츠란 말은 아직 좀 생소하다. 커뮤니케이션 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건 도리어 대면 생활이 분열하던 인터넷 등장 후 가상의 연결망에 의해서였고, 그때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당연스레 채팅, 문자에 의한 대화가 주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생활이 길어지며 대면 생활을 대신할 묘안을 궁리하는 세월에, 소리란 의외로 요긴한 발견과 같다. 잊고 있던 일상의, 문자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소통의 수단이고, 그렇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쓸모의 일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에겐, 서로 다른 시간에서 발신되는 텍스트의 파편적 소통이 아닌 화자와 청자 모두 같은 시간축에 존재하게 하는 실시간, 동시간적 소통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거리 두기의 2m쯤 가뿐하게 초월해버리는.
 
직접적인 예가 코로나19 직후 급증하기 시작한 플레이리스트. 장르나 발매 시기가 아닌 타인의 선택이 작용하는 이 음악군의 BGM은, 집에서의 시간이 늘어나며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 음악에 지나지 않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벌인 짓이기도 하다.
 
리서치 기관 ‘막스 플랑크 경험 미학 연구소’는 록다운 기간 중 음악의 쓸모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음악으로 사회적 연결의 스트레스를 해소했다”고 답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필요로 했던 건, 3~4분의 고정된 음원의 음악이 아닌, 너와 나 사이를 유동하는, 실시간을 함께 사는, 연결의 매개로서의 음악이었던 셈이다. 대표적 음원 사이트들이 최근 들어 플레이 리스트 기능을 강화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변화의 반영으로 읽힌다. 보다 나의 곁에 있는, 보다 이곳을 살아가는. 일본의 광고 전문지 <선전회의>는 지난해 ‘친밀함’을 2021년의 화두로 꼽았다.
 
팬데믹 기간 중 lo-fi 플레이리스트를 유행시킨 ‘lo-fi girl’ 채널은 공부하기 시작한 글로벌 흐름에 힘입어 구독자 1000만을 넘겼다. 여기서 lo-fi라는 건, 음질이나 화질이 다소 떨어진, 말하자면 거친 느낌이고, 미국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 심리학 교수 로버트 시저는 “팬데믹 기간 고립된 이들의 공허함을 로파이 음질의 사운드가 채우는 효과를 낳았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후 lo-fi 계열 플레이리스트 채널은 줄줄이 생겨났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디렉터 멜라니는 “음악이 일상과 결합되면서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발견한 시기가 지난 팬데믹 3년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충분히 골라 이용할 수있는 음원 사이트가 있음에도 코로나19 이후 일상의 빈자리를 채워준 건 엄선된 고음질 음원의 스트리밍이 아닌, 플레이리스트라는 새로운 유형의 ‘듣기 플랫폼’.
 
우리가 귀 기울였던 건 인기척이었을까. 집 안에 틀어박혀 음악을 틀고 소비한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리의 강점이라면 무엇보다 멀티태스킹. 골드만삭스는 향후 글로벌 오디오 시장에 대해 매년 배 이상 성장해 2030년엔 753억에 달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그닥 새로운 건 아니다. 국내에서 팟캐스트가 처음 등장한 건 2011년 팟빵이었고, 전 세계적으로 오디오북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건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1950년대 딜런 토머스의 시집, 그리고 1930년대 미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설립한 ‘오디오북 스튜디오’였다. 다만 최근 우리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건 데이터로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팟빵의 경우 2020년 전체 청취 시간이 전년 대비 60% 늘어 1억7445시간을 기록했고, 2017년 시작한 네이버의 ‘오디오 클립’은 동기간 방문자 수가 지난해 무려 93%(370만 명) 상승했다. 그에 더해 오디오북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활황의 물길을 찾은 듯 싶은데, 윌라가 공개한 2021년 결산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누적 다운로드 수는 180만 건에서 270건으로 약 1.5배 증가했다. 오디오북의 글로벌 시장은 2027년까지 매년 20% 넘는 성장이 예측되기도 한다. 영상에 시청 한계가 있는 것만큼, 음악에도 청취의 리미트는 어김없이 존재했던 셈이다.
 
윌라의 오디오북 사업 총괄 이화진 이사는 이렇게 분석한다. “집에 있는 시간은 늘어나는데 볼 수 있는, 보고 싶은 영상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오디오 콘텐츠로 시선을 돌리는 경향이 감지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영상은 멀티태스킹에 그리 적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언뜻 생각해봐도 시각보다 청각이 멀티태스킹에 덜 방해될 것 같은데, 심리학자 마커스 반 알펜은 자신의 저서 <관찰하는 리스닝(Observatory Listening)>에서 “사람은 듣고 듣지 않을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모르고 살았던 내 양쪽 귀의, 청력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오디오 시장, ‘귀의 활약’이 멀티태스킹과의 친화성 때문이라 이야기하는 건, 다소 시대착오적이다. 근래의 오디오 콘텐츠의 경향을 보면 음질상의 고성능을 추구하던 단계를 넘어, 소리 기반의 콘텐츠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무선 헤드폰과 스마트 스피커 등 유틸리티의 업그레이드는 보다 풍부한 소리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 ‘This American Life’는 지난해 팟캐스트 방송 ‘Serial’을 론칭 했는데, 단 두 에피소드의 다운로드 수가 3억4000만 회를 기록했다. 바이브는 첫 페이지에 오디오 탭을 배치하며 음악과 그 외 사운드 콘텐츠를 이동 없이 접속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음악과 뉴스, 책과 라디오가 아무런 경계 없이 같은 화면 안에 서비스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오디오란 공통 키워드 때문이다.
 
반경자 리더는 “최근엔 음악 감상뿐 아니라 다양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오디오를 즐기는 것이 추세”라고 말한다. 그렇게 지금 여기엔 소리로 다시 쓰여지는 일상의 한 챕터가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상임에 틀림없다. 네이버가 NOW를 시작하며 MZ세대와 소통의 장으로 꾸리고 있는 것 역시 이에 기인한 결정에 다름 아니다. 정혜미 리더는 ‘NOW는 트렌드를 앞서 나가는 콘텐츠를 거듭 구성하며 진행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새로운 콘텐츠, 플랫폼, 시대란 늘 새로운 세대에 의해 그려지곤 한다.
 
스포티파이는 2019년부터 팟캐스트 업체 링어, 김렛, 앵커, 피캐스트 등을 연달아 인수했다. 아마존은 지난해 최근 급부상하는 팟캐스트 제작사 원더리의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팟빵 역시 오디오 매거진에 이어 오디오북 제작에까지 나섰고, 아마존의 알렉스 역시 심상치 않은 낌새다. 소리 콘텐츠 시장을 둘러싼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이용자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어 다양한 시간, 장소, 상황을 아울러 제작, 확장된다. 겉으로 보면 거대 ‘소리 기업’들의 대대적이고 과감한 M&A로 보이지만, 그저 조금 더 ‘소리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하물며 늘 ‘음질 최선’을 외쳐왔던 소니가 지난해 발매한 무선 이어폰 ‘링크 버즈’는 (이어폰) 바깥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다.
 
만남을 잃고 소리에 의지해 살아가며 우리가 깨달은 건 보다 생활감의, 일상을 일상이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올해는 귀의 해였다’라는 아미르의 말은, 어쩌면 지난 1년은 우리가 세상에 가장 귀 기울였던 해라는 의미일지 모르겠다. 구석기와 신석기, 밀레니얼 문턱을 넘어 지금, 다시 한번 ‘소리의 일상’이 시작한다.
 
에르메스 재팬이 도쿄에서 전시했던 ‘에르메스 라디오’.
1 오디오 무비 <극동>을 녹음 중인 배우 김강우. 2 <극동> 리허설 현장.
3 NOW 라디오 방송 중인 지코. 4 코로나19 이후 유니클로가 공개한 ‘lifemusic’ 플레이리스트.
5 록 밴드 ‘더 백신’의 플레이리스트. 스포티파이는 ‘백신’을 주제로 플레이리스트를 모집하기도 했다. 6 집에서 스타벅스 매장을 체험하는 ‘스타벅스의 창’. 7 글로벌 인기 팟캐스트 ‘스토리텔’도 국내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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