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워진 소비 패턴: 공고해진 리세일 문화

2022. 11. 17. 22:52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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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자랑은 구식이 되고, 중고템 인증이 트렌드로 통한다. 위기 속에서 꽃피운 리세일 문화의 현주소.


스니커즈 매장이나 유명 편집숍 앞에 확실한 ‘의도’를 챙겨온 고객들이 오픈 전부터 장사진을 치는 풍경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이들이 건진 한정판 제품은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희소성을 탐닉하는 소비자들의 타깃이 되며 매번 원가를 훌쩍 넘는 판매 금액을 기록한다. ‘당근한’ 물건이라며 꽤나 만족스러운 듯 중고거래 경험을 무용담처럼 펼치는 지인들의 너스레도 익숙한 일상이다. 나만 해도 셀린느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의 흔적을 좇아 멸종해가는 올드 셀린느의 쇼 피스를 찾기 위해 더 리얼리얼이나 베스티에르 콜렉티브 같은 해외 중고 명품 사이트를 전전하는 고질적인 습관이 들어버렸으니까. 목적과 이유가 다를지라도 이처럼 새것에 집착하지 않고 남이 소유했던 물건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는 건 더 이상 특정 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을 재편성한 하나의 현상이고, 팬데믹이 불러온 경기 후퇴와 MZ세대의 신선한 소비 패턴과 맞물려 세력을 확장해온, 앞길 창창한 미래산업이다.

 

“브랜드는 이미지 상승을 위해 한정판 마케팅을 추진해왔잖아요. 제품의 가격은 자연스럽게 치솟았고요. 아무래도 리셀러들의 영향이 가장 크겠죠.” 유튜브 채널 와디의 신발장을 운영하는 고영대(와디)의 말처럼 리세일 붐의 잭팟을 터뜨리는 건 한정판 마케팅이다. ‘샀던 것을 되판다’는 리세일의 본 정의에 재테크 개념이 주입되기 시작한 것도 리셀러들의 활발한 활동에 기인한다. 팔기 좋고 사기 좋은 제품으로 스니커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시기를 지나 그 범위가 명품 브랜드로 확산된 건 요즘의 흐름. “팬데믹의 여파로 중고 명품의 수요가 확연히 늘었고, 럭셔리 제품 소비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구매 주기가 짧아진 탓이에요.” 럭셔리 리세일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의 CEO 막시밀리안 비트너는 펜데믹과 MZ세대 중심의 새로운 소비 패턴을 리세일 유행의 원인으로 꼽는다. 지난한 전염병 속에 값비싼 상품의 수요와 공급 체계는 급변했고, 그사이 소비자들은 중고 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플렉스’를 외치는 MZ세대에게는 리세일 플랫폼이 좀 더 쉽게 럭셔리 제품에 접근할 수 있는 매개체였을 것. 게다가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중고 명품 사이트만큼 구미가 당기는 놀이터가 있을까? 희소성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투자 목적이든 쉽고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명품을 구입하려는 영민한 세대의 신념에 기반한 것이든 소유보다는 경험에 초점을 둔 요즘의 소비 패턴을 발판으로 리세일 마켓의 인기는 수직 상승 중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화된 중고 플랫폼으로는 당근마켓과 번개장터가 있다. 패션 아이템에 한정하지 않고 가구와 육아용품을 비롯해 폭넓은 판매 품목을 제공하고 있으며, 당근 마켓의 경우 올해 5월 기준 월간 이용자 수가 1800만 명을 돌파했다. 크림도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나이키의 에어포스 1이나 덩크, 아디다스의 가젤 등 한때 특수를 노렸던 인기 모델부터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의 유작과 슈프림 한정판 등을 취급하며 리셀러들의 성지가 된 곳. 각각 타깃과 성격이 뚜렷한 플랫폼이지만 이 안에서도 앞서 말했듯 경험에 근거한 소비 스타일의 변화로 유독 명품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여기서 명품은 압구정 로데오역을 기점으로 청담동 거리에 뿌리내린 브랜드 간판을 떠올리면 된다. 월간 순 이용자 100만 명 달성을 목전에 둔 크림도 명품을 중심으로 스트리트 웨어와 수집품, 가전제품까지 취급하며 스니커즈 전문 거래 사이트라는 인식을 넘어 대형 이커머스로 발돋움했다.

 

이 흐름이 중고 명품 거래에 특화된 럭셔리 리세일 플랫폼의 성장으로 이어진 건 당연한 수순. 그 중심에 전 세계 2300만 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는 베스티에르 콜렉티브가 있다. 200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이 온라인 마켓은 개인 판매자가 원하는 제품을 등록하면 진품 검증부터 신속한 배송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이미 솔드아웃된 브랜드의 아이코닉 제품과 독특하고 희귀한 빈티지 피스를 발굴하는 재미가 쏠쏠해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난 사이트로, 지난 7월에는 한국 서비스를 론칭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한국어 기반의 웹과 앱에서 네이버나 카카오를 통해 간편하게 가입하고 패션 아이템을 국내외에서 쉽게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다. 편집숍이라는 골자를 유지한 채 부분적으로 리세일 서비스를 도입한 사례도 있다. 리세일 기술 업체 리플런트사와 협업한 네타포르테나 무신사가 만든 한정판 플랫폼 솔드아웃의 경우가 그렇다.

 

 

크고 작은 리세일 플랫폼과 관련 서비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와중에 가장 큰 걱정은 역시 정품 여부다. 중고 명품 소비를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산 물건이 가품은 아닐까 하며 내심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리셀 플랫폼은 크게 관리형과 P2P(person-to-person) 2가지로 분류되는데, 관리형은 상품 거래에 유통사가 개입한다. 정품 판매, 품질 관리, 사기 방지 등에 유리한 대신 대부분 업체들이 이용자들에게 수수료를 받는다. 반면 P2P는 플랫폼이 판매 공간만 제공하고 판매자끼리 알아서 거래하는 방식이다. 크림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 더 리얼리얼, 솔드아웃은 전자에, 당근마켓과 번개장터가 후자에 해당한다. 전문 판매 업자가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진 P2P형에 정품 보장에 대한 불신이 쏠리기 마련. 본래 P2P형으로 출발한 시크먼트는 크림과 협업해 관리형 플랫폼 시크로 재탄생했다. 한국 최초로 12단계 안전 인증 시스템을 도입한 점이 특별한데 보통 전화번호나 계좌 인증만을 요구하는 다른 플랫폼과 달리 시크에서는 거래를 위해 전화번호, 계좌, 카드, 신분증 그리고 사기 내역 인증까지 모두 통과해야 제품을 판매할 수 있다. 또 자체 검수센터와 전문 검수 인원들을 보유하고 있고, 무료 정품 검수 서비스를 제공한다. 만약 구매한 상품이 가품일 경우 구매 금액의 최대 300%를 보상해주는 안전망도 마련했다.

 

새로운 후발 주자가 속속 등장하는 리세일 시장의 판도는 고고한 럭셔리 브랜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환경 폐기물의 주 생산자로 지목돼온 패션 기업에게 지속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실천해나가야 할 숙제다. 또 리세일 문화가 순환 경제에 기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맥락이 이해된다. 발렌티노는 2021년부터 빈티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작년 10월 발렌티노 컬렉션을 수집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6월 전 세계 유명 빈티지 부티크 4곳을 선정해 브랜드의 빈티지 의류를 판매했고, 향후 패션 스쿨을 무대로 프로젝트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알렉산더 맥퀸은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와 손을 잡았다. 협업 프로세스는 이렇다. 알렉산더 맥퀸이 엄선된 고객에게서 제품을 확인하고 정품 감정 과정을 거쳐 적격 판정이 나면 재매입 가격을 책정한다. 이후 맥퀸은 지정된 맥퀸 매장에서 신제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권을 고객에게 지급하고, 베스티에르 콜렉티브는 해당 제품을 수급 받아 관심 있는 유저들이 정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외부 NFC 태그 작업을 한다. 비슷한 형태로 구찌와 버버리는 미국의 럭셔리 위탁 기업인 더 리얼리얼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멀버리는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와 협력하는 동시에 2020년 초 론칭한 멀버리 익스체인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순환 경제 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고객이 기존 가방을 매장에 반납하고 새로운 가방으로 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로, 국내에는 올해 하반기부터 도입할 예정이다.

 

“루이비통과 샤넬만 봐도 지난해 약 4~5차례 제품 가격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명품 브랜드 간의 가격경쟁이 저희 같은 중고 명품 판매 플랫폼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라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원하던 상품을 오픈런 없이 구매할 수 있고, 다양한 결제 혜택에 안전한 거래까지 가능하죠. 플랫폼을 통해 명품 구매를 안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시크 마케팅팀 최서영 팀장의 말이다. 상한선을 가늠할 수 없는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상은 리세일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만날 때마다 중고 명품을 걸치고 나타나는 한 지인은 “내 취향을 유지하는 방법이야”라며 확실한 소신을 내비치기도 한다. 신상만 진열한 브랜드 매장보다 시즌이 뒤섞이고, 누군가의 옷장에 있던 빈티지 피스로 가득한 온라인 창고는 매력적이고도 당연한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새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SNS와 스마트폰 앱을 실행하는 횟수만큼 리세일 서비스에 접속한다. 당장 내 옷장만 들여다봐도 중고 사이트에서 구입한 옷과 액세서리가 수두룩하다. 이미 우리는 공고해진 리세일 문화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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